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인 오스틴 (문단 편집) === 형제자매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4061802601_10.jpg|width=100%]]}}}|| * 그녀의 부모님 오스틴 부부에게는 독특한 양육 철학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기가 태어나면 몇 개월간은 커샌드라가 직접 모유 수유를 한 다음에 1년 정도 한 동네의 다른 가정에 맡겼다가 되찾아 오는 것이었다. 아직 부모와 아이간의 초기 애착 형성의 중요함 등과 같은 정교한 육아 이론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인 만큼 오스틴 부부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섯 아이를 모두 이런 방식으로 길렀는데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던 시기에 오스틴 아이들은 대부분 성인으로 건강하게 자랐고 서로 간의 애착도 깊었다. 유일한 예외는 둘째 아들인 조지였는데 그의 경우에는 선천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첫째인 제임스는 막내인 찰스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14살로 아버지의 모교였던 옥스퍼드의 세인트 칼리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처럼 독서를 좋아하고 학문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세인트 칼리지의 창립자의 후손이었기에 (외가인 리 가문 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학비를 내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시를 쓰기 시작했고 동생인 헨리와 함께 문예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으며, 아마추어 연극에도 흥미가 있어 동생들과 친구들 그리고 친한 이웃들을 모아 공연을 했던 세련되고 영향력 강한 오빠였다. 문예 잡지의 빠른 폐간 이후 전문 작가로의 꿈을 접고 목사가 된 그는 아버지로부터 스티븐턴 교구를 물려받았는데 갑작스럽게 바스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로 한 부모의 결정에 심한 충격을 받은 제인 오스틴은 후임자인 제임스와 그의 부인이 지나치게 기뻐할 뿐만 아니라 경매에 붙여진 가족의 물건들을 제대로 된 값을 내고 사서 보관해주지 않는 것을 두고 불평하기도 했다. 제인 오스틴은 제임스의 두 번째 부인인 메리를 싫어했으며(이는 양방향적 감정이었다) 첫째 오빠에게서 시인이자 문학가로서의 면모가 점차 사라짐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가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 애나는 제인 오스틴과 가까운 조카들 중 한 명이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많은 제인 오스틴에 대한 정보는 애나의 기록과 회상에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제임스 에드워드 리는 제인 오스틴의 전기를 썼다. * 둘째인 조지 오스틴은 현대의 기준으로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지만 어릴 때부터 종종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제인 오스틴이 수화를 할 줄 알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조지 오스틴은 말을 못 했거나 귀가 들리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는 환자들을 잔인하게 대했던 당시의 정신병원에 갇히는 대신 대신 어릴 때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있었던 외삼촌 토마스 리가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었던 조용한 시골 마을로 보내졌고 거기서 평생을 살았다. 조지 오스틴을 보살피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처음에는 부모가, 후에는 형제들이 분담했다. (영화 [비커밍 제인]에는 조지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형제들과 스티븐턴에 함께 살았다고 묘사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이 영화에는 이 외에도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 셋째인 에드워드는 아버지인 조지 오스틴이 교구와 농지 모두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부유한 사촌 토마스 나이트라는 사람이 결혼 후 부인과 스티븐턴을 방문했는데 12살이었던 온순한 소년 에드워드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해 신혼 여행에 데려갔다고 한다. 그 후로도 자주 이 부유한 친척의 거대한 영지에 자주 초대되었던 에드워드는 16세에 아이가 없었던 나이트 부부에게 정식으로 입양되었다. 이런 가족 내 입양은 당시 영국에서 흔한 일이었고 오스틴 가족들 역시 모두 에드워드의 운에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토마스 나이트가 죽은 후 많은 재산과 거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에드워드는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집 없이 떠돌던 어머니와 커샌드라와 제인에게 남은 일생을 보낼 수 있는 집을 제공했다. 죽기 얼마 전을 제외하고는 이 집에서 남은 일생을 보낸 제인 오스틴은 이곳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20대에 쓴 초고들을 수정하여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작품들로 다듬어내기도 했다. 에드워드의 11명의 아이 중 맏이인 패니는 제인 오스틴이 가장 좋아했던 조카로 어린 여동생에 가깝다고 느낄 정도로 친밀한 사이었다. 패니 역시 고모 제인 오스틴으로부터 훌륭한 충고와 애정으로 가득한 편지들을 많이 받았으며 제인 오스틴 살아 생전의 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의 회상과 기록 역시 제인 오스틴 연구에서 자주 인용되는 자료이다. * 넷째인 헨리는 제인 오스틴이 가장 좋아했던 오빠이자 그의 작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형제이기도 하다. 오스틴들 중 가장 매력적이고 낙천적이며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으나 가장 불안정한 삶을 살기도 한 그는 형인 제임스와는 달리 교구를 물려받을 가망도 없었고 유산도 없었기에 옥스퍼드 세인트 칼리지를 졸업한 후 목사가 아닌 군인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민병대 장교로 근무하는 동안 그는 군에 잘 적응했으나 그 당시 선택권이 별로 없었던 많은 젊은이들처럼 군인으로서의 삶보다는 춤과 군부대가 주둔한 마을의 아가씨들과 연애를 하는 것에 더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이 당시 헨리 오스틴과 같은 본토 주둔 민병대 군인들의 삶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잘 묘사되어 있으며 목사로의 길을 버리고 군인의 삶을 택한 매력적인 바람둥이 위컴의 모델을 헨리 오스틴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매혹적인 사촌 일라이자를 두고 형인 제임스와 경쟁을 벌이기도 했던 헨리는 결국 일라이자와 결혼 했고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은행을 개업해 빠르게 사업을 확장시키면서 런던에서의 화려한 삶을 즐겼으나 오래가지 못해 파업하고 말았다. 그는 그 후 결국 아버지와 형처럼 목사가 되었는데 아버지와는 달리 복음주의 노선을 걷게 된다. 헨리 오스틴과 그의 아내이자 사촌인 일라이자는 평생 제인 오스틴의 매우 가까운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그의 재능과 야심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특히 헨리는 작가인 여동생의 대리인으로서 출판업자들과 흥정하고 계약을 맺는 등 많은 일을 했다. 또한 그는 여동생이 죽은 후 커샌드라와 의논해 [노생거 애비]와 [설득]을 출판했는데 이때 그가 붙인 짧은 서문이 제인 오스틴에 대한 최초의 전기라고 볼 수 있다. 복음주의 노선을 걷게 된 목사가 된 후 헨리가 쓴 이 글은 독신으로 죽은 여동생의 독실함과 겸손함을 강조하고 있는 애정 어린 기록이지만 그의 조카인 제임스 에드워드 리의 전기와 더불어 전문 작가였던 제인 오스틴을 자신과 가족의 즐거움만을 위해 글을 쓴 아마추어로 비춰지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순종적인 여성상에 집착했던 빅토리아 시대를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던 이런 이미지는 후대의 수많은 제인 오스틴 학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 반박 되었다. * 다섯째인 커샌드라와 제인 오스틴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따로 책 한 권을 써도 부족할 것이다. 이들은 어머니인 커샌드라 오스틴이 "커샌드라가 목이 잘릴 처지가 된다면 제인도 따라 목이 잘리고자 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매우 친밀한 사이었으며 제인 오스틴은 언니와 떨어지기 싫어 다소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옥스퍼드의 여학교로 옮겨갔다고 전해진다. 이 학교에서 전염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두 사람은 다른 여학교로 옮겨 학업을 마쳤으며 그 짧은 교육이 자매의 유일한 공식적인 교육이었다. 수많은 조카들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을 방문하기 위한 잦은 여행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기간이 적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같은 집에 살 때면 늘 한 방을 썼다. 함께 있지 않을 때면 자매는 거의 매일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제인 오스틴은 언니인 커샌드라에게 짓궂은 농담부터 집필 중인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든 것을 믿고 털어놓을 수 있었다. 커샌드라는 20대에 먼 친척이자 아버지인 조지 오스틴의 학생이기도 했던 톰 파울과 약혼을 했으나 정착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던 그는 배를 탔다가 병에 걸려 죽었다. 커샌드라가 톰 파울과 약혼했던 시기는 제인 오스틴이 가장 활발하게 남편감을 물색했던 시기이기도 한데, 언니 없이 집에 혼자 남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지냈으며 오스틴 가족으로부터 두루 사랑 받았던 젊은 약혼자의 때 이른 죽음 이후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으며 제인 오스틴이 41세의 나이로 커샌드라의 품에서 세상을 뜬 후 그는 동생의 유언 집행인이자 작품 판권의 소유자가 되었다. 커샌드라 오스틴은 동생의 유언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평생 두 사람이 주고받은 방대한 양의 편지들을 지나치게 사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고 판단해 대부분 없애버렸으나 살아남은 편지들과 작품들, 원고들은 매우 좋은 상태로 잘 보관되었다. 이 자료들은 제인 오스틴이 아꼈던 조카들과 동생들이 물려 받았다. 그녀는 사랑하는 여동생이 죽은 후 [설득]의 한 페이지 여백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제인! 이 말들은 금으로 쓰여질 자격이 있구나!" * 여섯째인 프랜시스 오스틴은 제인 오스틴과 나이 상으로 가장 가까운 오빠로 어린 나이에 해군에 입대해 나폴레옹과 싸웠다. 그는 다른 형제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주어진 것이 없는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성실한 사람이었다. 프랜시스의 첫 아들이 태어난 후 제인 오스틴은 육아실에서 함께 자던 어린아이 시절부터도 늘 용감하고 반항적이었던 오빠를 추억하며 태어난 조카 역시 그런 성격을 닮기를 바란다는 사랑스러운 축하 시를 보내기도 했다. 프랜시스는 가족들 중 가장 유머 감각이 없다는 평을 받았지만(그의 상관이 바다에서 수영을 하는 동안 상어가 나타나자 프랜시스가 경고했지만 너무나 침착한 그의 태도에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상관이 믿지 않자 그는 저는 농담을 할 줄 모릅니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동생이 [맨스필드 파크]에 넣어두었던 해군 내 동성애에 관한 짓궂은 농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성실한 성격 답게 프랜시스 오스틴은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죽은 후 어머니와 자매들을 늘 도우려고 애썼고 가장 부유했던 에드워드가 고정적인 주거 장소를 마련해주기 전까지 제인 오스틴이 싫어했던 바스에서 벗어나 자신의 부인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집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제인과 커샌드라는 프랜시스의 부인 메리 깁슨을 매우 좋아했으며 함께 살았던 집도 좋아했으나 안타깝게도 메리는 열 명의 아이를 낳은 후 열 한 번째 출산에서 죽고 말았다. 말년에 프랜시스는 자매들의 절친한 친구였던 마사 로이드와 다시 결혼을 한다. * 막내인 찰스 오스틴은 형인 프랜시스처럼 어린 나이에 해군에 입대해 영국 해군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를 정통으로 관통하는 삶을 살았다. 유일한 동생이었던 찰스에게 늘 애정을 갖고 그의 삶에 관심을 가졌던 제인 오스틴은 [맨스필드 파크]와 [설득]에서 항구 도시 포츠머스와 물려 받은 재산 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해군들의 삶을 소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맨스필드 파크]의 가장 매력적인 인물인 윌리엄 프라이스(주인공 패니 프라이스의 해군 오빠)는 프란시스와 찰리를 섞은 인물로 보이는데, 윌리엄이 변변한 장신구 하나 없는 여동생 패니를 위해 목걸이용 호박석 십자가를 선물한 것처럼 찰스는 누나들에게 토파즈 십자가와 금줄을 선물했다. 이 선물을 받고 제인 오스틴이 커샌드라에게 쓴 편지에는 굳이 돈을 써서 이런 선물을 사오다니 혼을 내야겠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자주 만날 수 없는 막내 동생의 애정 어린 선물에 감동한 누나로서의 심정이 그대로 묻어 난다. 제인 오스틴의 사후 프란시스 오스틴은 그가 [설득]의 주인공 프레데릭 웬트워스의 모델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자신은 다른 인물에게 영감을 준 것 같고(웬트워스의 친구인 하빌 대령) 동생인 찰스가 웬트워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는 답을 한 적이 있다. 찰스 오스틴은 성실한 성품과 해군으로서의 긴 경력에도 불구하고 운이 따르지 않아 여유롭지 못한 삶을 살다가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